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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프 시술기: 용기를 설치할 수도 있다면

2019.11.7.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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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어느 날 지긋지긋해졌습니다. 또 임신 걱정을 하다가요. 그래서 루프 시술을 받기로 했습니다. 그런 결심을 했던 것이 6월 말. 이 글은 잠시 지난 여름 또는 그 이전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다가, 시술 당일이었던 8월 5일을 지나쳐, 그 후 세 달쯤 지난 현재까지의 일들을 기록합니다.

      자궁과 월경과 임신과 섹스를 얘기하는 글들을 읽을 땐 어쩐지 다음 단락에 일어날 일이 미리 걱정되어 조마조마한 분들도 계신가요. 결국은 읽기를 주저해본 경험도 있으신가요. 저는 자주 그렇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얘기를 읽으면 가슴이 아니라 아랫배가 아프지요. 이 글에선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건강하게 잘 지냅니다. 타들어가는 마음으로 ‘착상혈과 생리의 차이’를 검색하며 새벽을 보낸 적이 있을 소녀들에게 바칩니다.

    1. 프롤로그: 지긋지긋한 피임의 역사

      섹스의 역사와 제대로 된 피임의 역사가 일치하는 삶을 살아오셨나요. 그렇다면 참으로 다행이에요. 저는 첫 섹스를 하기 한참 전부터 임신과 섹스의 매커니즘을 잘 알았던(실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청소년이었습니다. 개인적인 관심도 많았고, 정보에 대한 접근성도 좋았습니다.

      우선은 나의 몸 또는 타인의 몸에 대한 호기심을 여타의 호기심과 다르게 취급하지 않는 친절한 보호자와 만족스러운 문답을 주고받으며 자랐습니다. 어른의 책과 아이의 책이 나누어 꽂혀있지 않은 책장에서 아무 책이나 손이 닿는 대로 읽었고, 제 머릿속에는 아름다운 은유로 가득 찬 세계의 동화들, 공룡이나 기차에 대한 놀라우리만치 구체적인 정보와(지금은 다 까먹었습니다), 사주팔자에 대한 잡다한 지식(역시 다 까먹었습니다), 불륜에 대한 재밌고 음침하고 지저분한 농담을 담은 카툰(이건 잘 잊히지 않더군요) 따위가 모두 동시대에 저장되었죠.

      머리가 좀 더 크면서부터는 접할 수 있었던 성교육 책은 거진 다 읽었습니다. 귄터 아멘스의 섹스북에 담겨있던 생생한 사진들은 꼭 자기 전에 다시 한번 생각이 났어요. 여성, 청소년, 대안교육 서적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출판사 '또 하나의 문화'에서 내주던 책들을 단비 맞은 고사리풀 같이 흡수하며 자란 사람이 저뿐만은 아니겠죠.

      그러니 제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섹스와 피임의 문제가 제 의지와 지식만으로 해결되는 일은 드물다는 걸. 혼자서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아마도 혼자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혼자일지를요. 아무래도 도움을 청하는 게 좋았겠지요. 당시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기에는 제가 모르는 게 없다는 점 때문에 자격을 상실한 느낌이 들었어요. 아는 게 힘이라면, 힘이 있는 한 책임도 오로지 저의 몫이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강원도의 시골에서 섹스를 하는 청소년으로 산다는 건 고달프고 변수가 많은 일입니다. 또래보다 조금 미리 똑똑하다고 될 일은 아니었던 거죠. 이웃집의 숟가락 갯수까지 훤하게 알 정도로 사각이 없는 동네에서, 콘돔을 제때 풍부하게 구비하고 산부인과를 정기적으로 다니며 섹스를 하는 몸에 벌어지는 변화를 점검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니 어떤 달에는 유일한 피임이랄 게 간절한 기도밖에 없는 웃지 못할 상황도 발생하죠(저는 그때나 지금이나 무신론자입니다). 월경을 시작한 것 같아도 며칠 간은 긴장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착상혈이란 게 있댔거든요. 수정란이 자궁내막에 착상할 때 나오는 소량의 출혈이라나요. 초록창에 착상혈을 검색하고, 속옷에 묻은 피를 유심히 보면서 이게 저번 달에도 봤던 바로 그 피일지 생각하느라 우울한 밤을 보내본 소녀들이 차고 넘치게 많다는 걸 알았을 때 얼마나 반갑고 속상하고 위로가 되던지요. 미리 알았다면 좋았을 거예요.

      이 글을 읽고 계신 모두의 삶에 비슷한 나이에 섹스를 시작한 동지들이 있길 바라요. 현명한 오지랖을 소유한 좋은 언니들과, 정확하고 구체적인 정보를 절제된 태도로 전달해주는 여성 건강의 전문가도 함께요. 기왕이면 그런 선생님이 있는 산부인과가 집에서 아주 가깝기를요.

      이렇게 저의 제대로 된 피임의 역사는 섹스의 역사보다 조금 늦게 시작했습니다. 피임기구에 대한 접근이 비교적 자유롭다는 점은 성인이 되고 누린 큰 위안 중 하나였죠. 20대 초반부터 얼마 전까지 쭉 콘돔과 경구피임약을 사용했어요.

      그래도 늘 더 편한 피임법이 없는지 아쉬웠습니다. 콘돔을 쓰는 섹스보다 안 쓰는 섹스가 비교도 안 되게 좋았고, 피임약은 매일 먹어야 한다는 점이 까다로웠거든요. 하루의 일정 중 피임약 먹기를 지나치지 않는 분들께 언제나 존경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뭘 해도 되실 분들이에요. 저는 알람을 맞춰놓아도 까먹기가 일쑤였습니다. 제 몸은 그닥 까다롭지 않아서 어떤 브랜드의 피임약이든 무던하게 잘 맞았지만, 흡연자이기 때문에 서른다섯 살 이후로는 부작용의 위험이 급격하게 올라간다는 점도 걱정스러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일찍 루프 시술을 고려하지 않은 이유는, 비쌌기 때문입니다. 콘돔과 경구피임약 구매에 드는 몇 년간의 금액을 더하면야 루프가 저렴하지만 한 번에 큰돈을 지출할 용기가 나지 않았고, 가끔 루프 가격을 검색해 볼 때는 꼭 사치를 부린다는 마음이 들어 포기했습니다. 섹스의 빈도를 생각하면 그냥 생활비에 포함시키는 게 마땅한 데도요. 확실한 피임이 주는 안정감이 일상의 다른 부분을 얼마나 수월하게 하는지를 고려하면 이만큼 남는 투자가 없다고 봐도 좋고요.

      항상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았던 피임의 역사를 어떻게든 바꾸고야 말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올해 6월 말의 일입니다. 계기랄 게 따로 있었던 건 아니에요. 만난 지 얼마 안 된 파트너에게 또 한 번의 인내를 발휘하다가, 문득 천년의 생을 버틴 고목처럼 피곤해졌습니다.

      왜 항상 나는 다 아는지, 왜 항상 나만 다 아는지. 상대를 앉혀놓고 질외사정은 왜 피임이 아닌지, 월경 중 임신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 콘돔의 피임률은 얼마나 되는지, 피임약은 어떤 원리로 임신을 막는지, 피임약을 언제 먹고 언제 휴약하는지, 그러는 동안 어떤 부작용이 얼마의 확률로 일어날 수 있는지 설명하는 날 없이는 연애를 시작할 수 없는 건지. 그날은 아주 건조한 태도로 화를 냈습니다. 왜 미리 몰랐는지요. 이 모든 것을요. 갑자기 한국 공교육의 실패와 섹스를 쉬쉬하는 한국 문화의 잘못에 대해 중언부언하기 시작한 파트너가 딱 입을 다물 때까지 말했습니다. 그에게는 창피하고 조금 억울한 통화이기도 했겠습니다. 그래도 미안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어요.

    2. 수술 준비: 나의 루프를 찾아서(7~8월)

      저처럼 걱정 없는 섹스가 간절했던 사람말고도, 다른 이유로 루프를 눈여겨봤던 분들이 계실 거예요. 현재 널리 쓰이는 호르몬 루프는 자궁 내에 황체호르몬을 분비하는 작은 기구입니다. 이 호르몬이 작용하면 자궁 내막이 얇아져서 수정란의 착상이 어려워집니다. 자궁경부의 점액은 점도가 높아져 정자의 운동성을 낮추고요. 참고로 기존의 구리 루프는 플라스틱 몸체에 감긴 구리 성분과의 염증 반응을 통해 비슷한 효과를 냅니다.

      호르몬 루프의 첫 세대라고 할 수 있는 미레나는 다른 루프에 비해 포함된 호르몬의 용량이 많기 때문에 월경의 양상 자체에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기본적으로 자궁 내막의 증식을 억제하기 때문에, 월경량이 많거나 월경통이 심했던 사람들에게는 효과적인 치료 방법이기도 한 거죠. 어떤 목적이었든 미레나 시술 이후에 대부분의 사람이 월경량의 감소를 경험하고, 잘 맞는 경우에는 월경이 거의 없어진다고 해요. 따라서 산부인과에서 월경과다 진단을 받은 사람이라면, 미레나 시술은 곧 치료 목적이 되기 때문에 보험 적용까지 받을 수가 있습니다. 무월경이라니! 미레나의 인기가 높은 이유를 짐작하실 수 있겠죠.

      그런데 결과적으로 저는 미레나가 아니라 그 다다음 세대인 카일리나를 삽입하게 됩니다. 이 결정에는 기존의 월경 양상과, 자궁의 형태, 원하는 피임 기간과 시술 가격 사이의 비교 등이 골고루 영향을 끼쳤는데요. 이제부터는 루프 시술 전 저의 월경 양상과, 시술 전 고려했던 조건들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호르몬 루프의 세 가지 선택지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적습니다. 어떤 목적으로 루프를 고려하고 계시든 도움이 된다면 좋겠어요.


      ❍ 월경과다

      저는 월경주기가 불규칙했던 편입니다. 사실은 제 주기를 잘 모르고 살았는데요, 부끄럽지만 정확한 월경주기를 체크하려고 노력했던 적이 없다는 점을 미리 실토합니다. 월경의 불규칙성 자체가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산부인과에서 따로 상담을 받은 적도 없습니다. 불편한 게 있었다면 상대적으로 월경량이 좀 많았다는 점인데 그러려니 하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한 2년 전부터 월경량이 좀 버거울 정도로 늘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월경주기는 전보다 짧아졌는데, 월경 기간은 길고(짧게는 일주일에서, 길게는 이주일 가까이 생리대를 썼습니다), 피가 한 번 쏟아지면 어떤 오버나이트로도 안심이 안 됐습니다. 월경의 양상도 좀 귀찮았는데, 처음 피가 비치고 일주일이 넘도록 월경이 시작되지 않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그 기약 없는 기간에 괜히 낭비된 생리대가 많았죠. 빨래를 한 번도 안 해도 되는 월경 기간을 보낸 기억은 거의 없고요.

      많은 여성이 자신이 월경과다에 해당하는지 모르고 지내니 꼭 산부인과로 가보라는 친구의 말을 듣고 처음 깨달았어요. 내가 칠칠맞은 것만이 문제는 아닐 수도 있겠구나! 미레나가 월경과다증의 치료 방법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저는 별다른 옵션을 고민하지 않고 곧장 산부인과로 갔습니다. 우선은 월경과다 진단을 받는 게 중요했죠. 미레나는 평균적으로 30만 원에서 35만 원 선인데, 보험 적용을 받는다면 가격을 십만 원대까지 낮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생각지 못했던 변수, 폴립

      그런데 미레나 시술을 알아보러 집 근처의 산부인과로 처음 상담을 하러 갔을 때, 저는 초음파 검사를 통해 경부에 작은 폴립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폴립은 조직이 조금 웃자라서 생긴 작고 부드러운 혹을 이르는 말인데, 여성들의 반 정도가 흔하게 가지고 있고 그 자체로 문제는 아닙니다. 암인 경우는 아주 드물고요.

      하지만 저의 경우 폴립이 문제가 됐던 이유는 그게 월경과다의 거의 확실한 원인이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월경과다의 치료가 목적이라면 미레나 시술이 아니라 폴립 제거 수술이 필요한 거였죠. 미레나를 삽입하더라도 폴립이 있으면 월경량이 많을 테니까요. 월경의 전조라고 여겼던 출혈도 사실은 폴립에서 나오는 부정출혈일 가능성이 컸고요. 놔둬도 큰 문제가 생길 가능성은 적지만, 사이즈를 보았을 때는 꾸준히 커진 것 같고, 게다가 확실하게 일상에 불편을 느끼고 있는 중이니 수술을 꼭 하는 게 좋겠다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뜻하지 않게 수술이라니 아득하고, 무엇보다 당장 루프 시술을 미뤄야 한다는 게 실망스러웠습니다. 물론 수술과 상관없이 미레나를 시술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만약 보험 적용을 받고 싶다면 수술 이후에 다시 폴립이 없어도 월경과다증이 있는지를 확인해야 했습니다. 일정과 돈을 처음부터 다시 계산해야 하다니. 여기까지 오는 것도 어려웠는데요.

      다 그만두고 싶은 유혹을 3일쯤 견뎠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냥 폴립 제거 수술도 하고 루프 시술도 하기로 마음먹었죠. 이미 알아버린 폴립을 무시하기는 어려운 일이고, 이 이상 가치 있는 소비가 드물 거라는 사실도 분명했어요. 그러기 위해서 우선은 다른 산부인과를 찾고 싶었습니다. 아무래도 의사가 모든 과정을 너무 급하고 강하게 권했다는 느낌이었거든요. 그의 열정적인 설득 안에서, 저는 자꾸만 있어도 살고 없어도 사는 몇십만 원의 돈을 아끼기 위해 스스로의 건강을 방치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야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때 산부인과를 바꾸기를 참 잘했어요. 아마 이 모든 결정 중에서 제일 잘한 일 일지도요. 산부인과를 바꾸고 나서의 모든 절차는 순조로웠습니다. 무엇보다 죄책감이 됐든 두려움이 됐든 부담감이 됐든 주저함의 이유를 들여다보는 데 드는 시간을 충분히, 남김없이 쓰고도 눈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 첫 번째 상담: 미레나, 제이디스, 카일리나

      현재 널리 시술되는 호르몬 루프는 미레나, 제이디스, 카일리나 세 가지가 있는데요. 셋 다 자궁경부를 통해 삽입하는 T자 형태의 루프로 작용원리가 똑같고, 전반적인 효과와 부작용의 양상도 비슷하지만, 스펙으로 볼 때는 포함된 호르몬의 용량, 기구의 크기, 피임 지속기간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세 가지 루프 비교표

      세 가지 루프 비교표

      미레나는 호르몬 함량이 제일 많고, 삽입기가 상대적으로 굵으며, 피임 지속기간은 5년입니다. 그리고 세 루프 중 미레나에만 보험적용이 가능합니다. 이후에 나온 제이디스는 호르몬 함량이 미레나의 반 이하로 적고, 삽입기가 미레나에 비해 가늘고, 피임 지속기간은 3년입니다.

      미레나는 그 굵기 때문에 시술 시에 통증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고, 호르몬 용량이 많은 만큼 효과도 부작용도 큽니다. 미레나의 단점을 보완하여 나온 제이디스는 가는 만큼 삽입이 비교적 편하고, 호르몬 용량이 적어 부작용도 적은 대신 그만큼 피임 기간이 짧아지는 거죠.

      마지막으로 나온 카일리나는 호르몬 용량은 제이디스보다 좀 더 많은데, 굵기는 제이디스와 비슷하고, 피임 지속기간은 미레나와 똑같이 5년입니다. 대신 카일리나는 세 루프 중에서 가장 비쌉니다. 병원에 따라 다르지만, 전후의 검사비를 제외하고도 40만 원대에요.

      월경의 양상이 중요한 기준이라면, 월경통이 심하고 월경량이 너무 많은 경우 미레나가 좋고, 월경통이나 월경량이 상대적으로 적거나 호르몬 부작용이 염려되는 경우에는 제이디스나 카일리나가 좋고요.

      저는 피임 기간은 길수록 좋고, 월경통은 별로 없지만 월경량이 아주 많았고, 시술의 통증은 그닥 무섭지 않았습니다(근거가 있는 용감함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보험적용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조금이라도 돈을 아끼는 게 좋았어요. 새로 찾아간 병원에서도 수술 후에 미레나 시술을 받고 싶다고 콕 집어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은 의아한 눈치셨습니다. 출산 경험이 없는 여성이 미레나를 고집할 이유가 없다는 거였죠. 출산 경험이 없다하더라도 경부가 넓은 편이면 미레나의 굵기도 참을만하겠지만, 검사 결과 경부도 좁은 편이라 통증이 클 텐데 위험을 감수하지 말라고요.

      통증을 단순히 참고 못 참고의 문제뿐만은 아니고, 실제로 루프 시술 후 3~6개월이 지난 후에도 아랫배 통증과 부정출혈 등의 부작용이 사라지지 않아 고민 끝에 제거하는 경우가 꽤 있다고 해요. 제 월경과다의 원인은 경부에 있는 폴립이었기 때문에, 폴립 제거 이후에는 루프와 상관없이 분명히 월경량이 줄 거고, 제이디스나 카일리나에도 월경이 감소하는 효과가 있는 것은 똑같기 때문에 여러모로 미레나가 적합하지 않다는 설명이었습니다.

      그러면 제이디스로 하면 될까요?

      3년 후에는 임신 계획이 있나요?

      아니요.

      그러면 3년 뒤에는 재시술을 하고 싶을 텐데 그냥 카일리나가 싸지 않을까요?

      그렇네요.

      선생님의 논리는 빈틈이 없었습니다. 순순히 카일리나를 시술하기로 했죠. 그러겠다고 말하자마자 얼마나 어마어마한 안도감이 밀려오던지요. 사실은 내심 무서웠어요. 그리고 무섭고 서럽지 않기 위해 비용을 지불할 여유가 될 때 꼭 한 번쯤 그래보고 싶었습니다. 세상에는 서러우면 서러운 그대로 서러워야 할 일이 더 많았으니까요.

      첫 번째 상담에서는 자궁에 다른 이상이 없는지 체크하려고 검사를 받았습니다. 하는 김에 자궁경부암 검사, 균 검사, 성병 검사를 쭉쭉 다 끝냈죠. 1~2주 안에 결과가 나오면 다시 내원하면 됩니다. 미뤄두었던 구몬을 해치운 듯이 가뿐한 발걸음으로 산부인과를 나섰습니다. 지갑도 마음도 가벼웠어요.


      ❍ 두 번째 상담: 수술 날짜 정하기

      7월 15일쯤 다시 병원을 방문했을 때, 첫 번째 검사 결과는 좋았습니다. 제거될 폴립은 있을 자리에 그대로 있었고, 균이 2개 발견되었는데 염증 수치가 높았던 것은 아니고, 다른 검사에서도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죠. 폴립 제거 수술은 경부를 통과해 조직을 떼어내야 하므로 어쩔 수 없이 수면마취를 동반할 뿐, 따로 입원할 필요도 없이 30분 안으로 끝나서 당일에 퇴원하고 일상생활도 할 수 있는 비교적 간단한 수술입니다.

      그럼 수술을 하고 나서는 얼마가 지나야 호르몬 루프 시술을 받을 수 있나요?

      수술할 때 바로 넣는 거예요. 루프 시술만 받을 때는 마취를 안 해서 상당히 아파요. 마침 수면마취 중일 때 싹 집어넣으면 되니까 딱 좋죠.

      다행이네요. 저, 수술은 8월 5일쯤에 잡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가능은 하죠. 다른 이상 없는데 왜 8월까지 기다리세요?

      어머니가 반드시 와서 봐야겠다고 하셔서요.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처리하고 싶었는데, 소식을 들은 엄마와 예상 밖의 실랑이를 벌이느라 수술은 8월의 일로 미뤄지게 되었습니다. 큰일이 아니고 퇴원도 당일에 한다고, 그날의 나를 돌보기 위해 강원도에서부터 누가 오는 건 낭비밖엔 안 된다고 아무리 힘을 주어 말해도, 그는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어요. 이 수술만큼은 당신이 지켜볼 수 있는 날에 잡아달라는 강력한 요청까지 넣었죠. 사실 살면서 거의 처음 보는 강단이었습니다.

      전신마취하는 거 아니니? 너 그거 마취 깨는 것만 해도 일이야.

      아니야. 수면마취 정도에요. 전신마취랑은 비교도 안 되게 약한 거야.

      엄마 예전에 전신마취했을 때, 너희 외할머니랑은 말도 안 섞은 지 한참 됐을 땐데, 그날은 병실 침대에서 눈 딱 떠질 때부터 어엄마아하는 소리밖에 못 냈어.

      아빠는 어디서 뭐하구?

      옆에 다 있었지. 그래도 아무 소용도 없어.

      엄마는 무슨 일로 전신마취를 했었는지 묻지는 않았습니다. 드문 일이니만큼 그냥 깨끗이 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8월 5일이면 마침 다음 월경이 시작한 뒤거나 끝날 때여서 딱히 나쁜 날짜도 아니었습니다. 루프 시술은 보통 월경이 끝난 직후를 골라 하게 되는데, 자궁문이 이미 열려있어 기구 삽입이 쉽고, 월경혈이 다 쏟아진 다음이기 때문에 삽입한 기구가 피에 쓸려 움직일 위험도 적습니다.

      날짜를 잡고, 주의사항을 들었습니다. 수술하기 8시간 전부터는 물을 포함해 아무것도 먹거나 마시지 말 것, 처방전에 자궁 경부를 열어주는 약이 하나 들어있을 테니 기억해뒀다가 수술 전날인 8월 4일에 복용할 것. 그 약을 제외하고는 앞으로 일주일간 복용할 항생제가 있는데, 질에 있는 균 2가지에 대한 약이 한꺼번에 들어있어 많이 메스꺼울 수 있으므로 반드시 금주하고 식사를 잘 챙길 것.

      모두 제가 까먹기 딱 좋은 주의사항이라 떨리는 마음으로 플래너에 별표를 쳐가며 주의사항을 적은 뒤에 병원을 나왔습니다. 사실 위장 건강에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의사 선생님이 다른 옵션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약을 짧게 먹는 쪽을 택한 건데, 약이 독하기는 독해서 고생을 했습니다. 약을 먹는 내내 질 건강을 잘 챙기자고 여러 번 기합을 주었습니다.

    3. 수술 당일: 일상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의 의미(8월 5일)

      금식도 약 먹기도 잘 지키고서, 8월 5일에는 아침부터 엄마 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하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수술보다는 수술이 끝나고 함께 먹을 식사가 기다려졌어요. 병원에 도착해서는 한 시간 정도 수액을 맞았는데, 춥거나 으슬으슬한 느낌이 들 수 있다고 이불을 여러 개 가져다주셨습니다. 많이 춥지는 않았는데 심심하고 적적했어요. 보호자를 위한 공간이 따로 없어서 엄마는 집으로 돌아갔다가 수술이 끝난 후에 다시 만나기로 했거든요. 수액을 다 맞은 후에는 수술실로 들어갑니다.

      저는 소위 수치의자, 굴욕의자라고 불리는 산부인과 의자에 눕는 것을 좀 좋아하는데요. 시원하고 편하잖아요. 수술할 때도 정확하게 같은 포즈로 같은 의자에 눕습니다. 다른 게 있다면 수면마취 중에 움직일 위험 때문에 손발을 의자에 고정해야 합니다. 수술을 준비하는 간호사 선생님이 아주 미안해하시며 저의 사지를 정성스럽고도 탄탄하게 묶어주시는데, 굴욕의 전혀 새로운 경지에 올라보는 느낌이라 자꾸만 웃음이 터졌습니다.

      이후로는 수면 마취 주사를 맞으면서 의사 선생님이 어쩌면 어머니와 그렇게 똑같이 생겼느냐고 물었던 것까지 기억이 납니다. 하도 많이 들었던 질문이라 능청스럽게 준비된 대답을 하려는데 반짝 잠에서 깼고 수술은 끝나있었어요. 이 사사로운 질문과 대답 사이의 시간 안에 기존의 몸에서 무언가는 제거되고 무언가는 추가됐다는 게 잘 믿기지 않았죠.

      아주 나른하고 배가 고픈 상태로 회복실로 옮겨서 마취가 깨기를 기다렸습니다. 억지로 깰 필요는 없고 충분히 졸면 됩니다. 저항할 수 없는 졸음에 대해 무려 의학적 허락이 떨어졌다는 사실이 퍽 황홀하게 느껴졌습니다. 매일 위스키를 일정량 이상 마셔야 한다는 처방전을 받은 사람이 약국에 간다면 이런 기분일지도 몰라.... 잠기운이 거의 물러갔을 때는 오후 2~3시 정도였어요. 아침 9시에 병원에 도착해 모든 절차가 끝날 때까지 대여섯 시간 정도가 걸린 셈입니다.

      병원을 나오기 전 진료실로 가서 수술 후의 주의 사항에 대해 들었습니다. 총 2장의 안내문을 받았는데요. 하나는 폴립 제거 수술 후의 주의사항이고, 하나는 루프 시술 후의 주의사항이었어요.

      폴립 제거 수술 후 주의사항

      폴립 제거 수술 후 주의사항

      루프 시술 후 주의사항

      루프 시술 후 주의사항

      염증 반응이 있는지 보기 위해 며칠간 통원을 하며 상태를 점검하고, 한 달 후에 다시 내원하여 루프가 자리를 잘 잡았는지 확인합니다. 2주간은 금주, 성관계는 3주 후부터 가능, 운동이나 다른 일상생활은 다음 날부터 그대로 해도 괜찮습니다. 수술 후 3개월에서 6개월 안에 웬만한 부작용이 다 나타나게 되는데, 아랫배에 통증이 있거나 소량의 부정출혈이 꾸준히 있을 수 있으며, 원래의 월경주기가 왔을 때 월경통이 심해질 수 있습니다.

      저는 폴립을 제거했기 때문에 당장 다음 월경부터 양이 많이 줄었다고 느낄 수 있는데, 루프 시술만 했다고 쳐도 6개월 이후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월경량이 감소하는 변화를 겪는다고 합니다. 그때쯤에는 자궁이 카일리나에 적응하고, 월경의 양상이 어느 정도 안정되겠지요. 그래도 제일 어렵고 힘들고 비싼 과정은 지났습니다. 폴립 제거 수술은 보험 적용이 되기 때문에, 카일리나 시술과 합쳐 60만 원이 조금 넘게 들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그사이 엄마가 끓여놓은 미역국을 살짝만 데워서 거의 마시듯이 해치웠습니다. 배가 고플 뿐, 아프지는 않아서 방금 수술을 했다는 사실이 의심스러웠어요. 수술 당일과 다음 날이 제일 아플 거라고 소염제와 진통제를 처방해주셨는데 저는 수술 직후에 하나도 통증이 없었거든요. 진료실을 나서기 직전에는 조심스럽게 아프지 않은 것도 정상이냐고 여쭤보기까지 했습니다.

      괜한 짓이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갑자기 열여섯 살 때나 느껴봤던 것 같은 날카로운 통증이 쨍하게 몰려왔습니다. 밑이 빠진다고 하는 바로 그 느낌이기도 하고, 내부를 천천히 긁는 것 같은 느낌이기도 합니다. 심한 월경통 없이 20대를 보낸 지가 오래되어서 통증을 느끼는 매 순간이 새삼스럽게 놀라웠어요. 아랫배가 절로 접히고 몸이 동그랗게 말리는 고통이었습니다. 몸 안에 뭔가가 있긴 있구나를 알 수 있었어요.

      그리고 그때가 되어서야 당일부터 일상생활이 가능하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엄격하게 병원에서 받아야 하는 의료적 조치가 추가로 필요하지 않을 뿐, 당일부터 달리고 일하고 어제와 하나도 다르지 않은 하루를 보내도 좋다는 의미는 아닌 거죠.

      왜 그런 기대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수술을 마치고 나면 맘 졸였을 엄마와 동생을 데리고 뭐도 먹고 수다도 떨고, 하루가 저물 때는 허리를 꼿꼿이 편 채 본가로 돌아가는 엄마를 배웅도 하리라고, 어쩌면 밤에는 우편물을 확인하고 집청소도 좀 할 수도 있을 거라고요. 혹여 오늘의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없었을 거고, 결과적으로 엄마의 방문은 귀하고 반갑고 즐거운 모녀 상봉의 의미가 더 컸던 것으로 판명 날 거라고요.

      그러나 딱 처음 배가 아프던 순간에, 저는 살림꾼 장녀로서의 체면을 얌전히 내려놓고, 이 집의 오늘에 대한 모든 권한과 의무를 엄마에게 완전히 양도한 뒤에 침대로 기어들어 갔습니다. 오늘을 부탁해요, 계향씨. 까무룩 잠이 쏟아졌어요. 5시간을 내리 자고 나왔을 때 거실과 부엌과 화장실 모두에서 단정하게 윤이 나고, 핸드폰에는 용케 알고 몸 상태를 묻는 벗들의 메시지가 도착해있었습니다. 아랫배는 씻은 듯이 잠잠했고요. 그러고 보면 여태까지의 일상은 혼자서 잘 꾸려왔다는 것도 순 거짓말입니다. 배가 안 아프니까 다시 허기가 졌습니다. 먹보처럼 밥을 많이 먹고 또 약을 먹었습니다.

    4. 수술 이후: 부작용과 변화(8월~지금까지)

      현재가 11월, 폴립을 제거하고 루프를 설치한지 세 달 정도 지났습니다. 저는 루프가 잘 맞은 케이스였던 것 같아요. 검사 결과 위치도 잘 잡혔다고 하고, 아직까지는 당일만큼 아팠던 적도 없습니다.

      2주 전인가 영등포에서 오래 못 만난 친구들과 늦은 점심을 먹었는데요. 서로의 최근 소식을 따라잡고 보니 미레나를 한 친구, 제이디스를 한 친구, 그리고 카일리나를 한 저 이렇게 세 명이 나란히 앉지 않았겠어요. 시기로 치면 제가 제일 나중인 셈인데, 하나같이 너 이제 무적이 되었구나 축하를 해주어 뿌듯했습니다. 시술을 받은 시기도 각자에게 나타난 부작용도 제각각이었지만, 서로가 겪었던 일과 겪게 될 일에 대해 공유하고 보니 제가 상대적으로 무난하게 적응한 편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어요.

      루프는 자궁 내에만 호르몬을 분비하기 때문에 오히려 몸 전체에 호르몬을 돌게 하는 경구피임약보다 부작용이 더 적고 안전하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앞서 말했던 출혈이나 통증 등 대표적인 부작용 외에, 몸이 붓거나, 입맛이 많이 돌고 살이 찌거나, 갑자기 여드름이 생기거나, 우울감이 심해지는 등 다양한 신체적 변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저도 크고 작은 부작용을 겪지 않은 것은 아니에요. 물론 폴립 제거 수술의 후유증도 다소간 영향을 미쳤겠지만요. 루프 시술 이후 지금까지 제게 일어났던 변화들을 순서대로 적어봅니다.


      ❍ 아랫배 통증

      생각보다 참을만했습니다. 다만 매시간 지속적으로 은은하게 아프다기보다는, 종일 있는지도 모르다가 한 차례씩 상당한 통증이 찾아오는 식이었어요. 할 수 있는 활동의 종류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지만, 어떤 일이든 이전의 속도와 강도로 해내기는 어려웠습니다. 전반적으로 모든 걸 쉬엄쉬엄하며 한 달 정도를 보냈습니다.

      낮보다는 주로 밤에 아팠고, 운동한 직후에는 통증이 확 심해졌습니다. 수술 다음 날 필라테스를 했다가 크게 아파서 덜컥 놀랐는데, 웬만큼 격한 운동을 해도 루프가 움직이거나 빠질 확률은 없으니 안심해도 된다고 합니다. 통증은 있을 수 있지만 루프가 움직여서 오는 통증은 아닌 거죠.

      미레나를 한 친구의 말에 따르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심한 월경통의 느낌이라고 해요. 월경주기 근처에 심해지고요(루프는 월경 기간을 줄일 수는 있지만 개인의 주기를 변화시키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월경통을 줄이기 위해 미레나를 생각하시는 분에게는 몇 개월 정도는 더 고생할 수도 있다는 첨언을 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영 불편하다면 일반적으로 월경통에 먹던 약을 먹어도 돼요. 저는 약이 아주 잘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타이레놀처럼 아세트아미노펜 계열인 진통제는 잘 안 듣고, 덱시부프로펜 계열의 진통제는 감쪽같이 들어요. 현재는 아침에 약을 하나 먹으면 전혀 모르고 지냅니다.


      ❍ 부정출혈

      9월 말까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출혈이 있었습니다. 통증이 왔다 가면 십중팔구 출혈도 더 많습니다. 그렇다고 양이 아주 많지는 않아요. 일주일 정도는 불안해서 소형 생리대를 쓰다가 곧 팬티라이너로 충분해졌어요. 이전에는 중형 이하의 생리대로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귀찮아도 반가운 변화였지요.

      생리대를 착용해도 아랫도리가 묵직하지 않으니까 살 것 같았습니다. 불행히도 월경을 오래오래 하는 데에 익숙해져 온 터라 제게는 크게 불편하지 않은데, 3~4일이면 월경이 끝나던 분들에게는 스트레스가 클 것 같아요. 6개월이 지나고도 루프를 한 이상 소량의 불규칙한 부정출혈은 있을 수 있다고 합니다. 저의 경우 한 달이 지나면서부터 또 한 번 출혈의 양이 줄었습니다. 어서 그만 나오면 좋겠네요.


      ❍ 피부트러블

      제일 나중에 생긴 현상인데 이후로 산부인과에서 상담을 받은 적이 없어 루프와 관련이 있는 증상인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큰 변화랄 게 루프밖에 없어서 심증만 가지고 있습니다. 수술을 받고 3주 정도 지났을 때 등에 붉은 두드러기가 넓게 생겼었어요. 아프지는 않았지만 보기에는 조금 불길해서 임시방편으로 집에 있던 리도맥스 연고를 이틀 정도 발랐더니 가라앉는 것 같았습니다.

      두드러기가 사라지고 얼마 안 있다가 가슴께와 허벅지에 작고 빨간 반점들이 올라왔습니다. 없어진 곳도 있지만 남아있는 곳도 있어요. 정체를 잘 모르겠는데 여드름이나 포진처럼 돌출된 것도 아니고, 전혀 가렵거나 아프지도 않습니다. 보통 멍이 거의 사라질 때쯤 보이는 붉은 반점에 제일 가까워요. 불편한 점은 없지만 보기에는 심란할 수 있죠. 얼렁뚱땅 방치한 채로 두 달을 넘기고 있습니다. 얼른 병원에 들러야겠어요.

    5. 에필로그: 용기를 설치할 수도 있다면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저는 잘 지냅니다. 이 글에서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약속드렸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는 동안 우울하거나 피곤하셨을까봐 굳이 힘을 주어 덧붙여보아요. 루프 인간이 된 이후에 처음으로 한 섹스는 얼마나 좋았는지요. 지난 두 달간 평생 가져본 적 없는 종류의 용기가 생긴 것을 느낍니다.

      이상한 일이죠. 몸에 설치된 작은 기구 이전과 이후로, 세상을 대하는 자세가 완전히 달라지기도 한다는 게요. 루프 시술 이전에도, 저는 밤 산책을 나가고 싶을 땐 나가자고, 택시를 타고 싶을 땐 타자고, 궁금한 사람의 방에서 아침을 맞을 기회가 생긴다면 그런 순간은 놓치지 말자고 다짐하며 지냈습니다.

      그런 다짐을 철회하고 싶어지는 날에는 조금 더 힘을 주어 말했죠. 여성으로서 겪을 수 있는 부조리와 폭력의 길고 긴 리스트에도 불구하고 보폭을 줄여서 걷지는 말자고요. 그런데 시술 이후에 저는 이전의 보폭도 좁았다는 걸 느껴요. 저는 얼마나 두려움에 익숙해져 있었던 걸까요? 용기란 이렇게 쉽게 설치되기도 하는 걸까요?

      그런가하면 아주 날카로운 고통이 느껴지는 날에는 덜컥 겁이 나기도 합니다. 필시 인공적인 장치만이 이런 선명한 고통을 초래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죠. 과학적 근거라고는 하나도 없는데도요. 그러면 저는 가장 심한 월경통이 어땠는지 기억을 더듬어보면서, 당장 느껴지는 통증이 '자연스러운 통증'과 얼마나 비슷한지 견주느라 머리를 굴립니다.

      그러다 문득 이 겁남의 정체와 기원이 궁금해지죠. 의학의 발전에 힘입어 피임을 위한 물리적, 화학적 보조를 받고 있다는 사실, 자궁 안에 인공적인 장치가 있다는 사실로부터 오는 이 기묘한 거부감은 뭘까요? 이미 저의 다른 신체는 각종 방법으로 연장된 지 오랜데요. 이 글을 쓰는 데만도 안경과 스마트폰, 블루투스 키보드의 도움을 받았고, 유독 졸음이 쏟아지던 오늘 아침에는 친구가 선물해준 것까지 총 세 종류의 영양제를 먹었죠. 그런데도 왜 저는 제 자궁의 활동이 아직 '자연스러운 범위'에 들어가는지 이따금 걱정할까요? 호르몬 루프나 블루투스 키보드나 하나도 다른 점이 없으면 안 되는 걸까요?

      이런 의문을 해결하는 일이 작은 숙제라면 숙제로 남아있겠습니다만, 뭐, 그건 새로 얻은 자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녜요. 그간 임신 걱정에 쏟아 온 시간과 에너지를 계산해보건대, 아마 그런 숙제야 해결하고도 남을 여유가 주어질 거거든요. 앞으로 5년간은 피임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된다니. 아, 피임의 역사 속에서 경험했던 온갖 치사함과 비굴함과 궁색함을, 이따금 인간을 미워하게도 했었던 그 시간들을 전보다 산뜻한 유머를 담아 바라볼 수 있을 것만도 같네요. 내가 무적이라니!

      물론 아닙니다. 호르몬 루프는 99%에 육박하는 피임률을 보이지만, 성병의 위험까지 막아주는 것은 아니니까요. 특히나 새 파트너가 생겼다면 필히 콘돔을 병용하고 성병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겠죠(저에게 하는 소리입니다). 심지어 콘돔과 루프를 총동원한다고 해도 도무지 맞설 수 없는 관계의 외로움과 괴로움이야 다 나열해서 뭐하겠어요. 앞으로도 우리는 얼마나 다채롭게 비참하고 슬프게 될까요.

      그래도 저는 여전히 타인 안에서 반짝이는 탁월함과 기쁨의 순간들을, 혹시 모르는 마음으로 찾아나서는 일이 좋습니다. 그러려고 평생 신발끈을 단단히 묶고, 선물받은 차를 내려 마시고, 이따금 꽃을 사놓기를 잊지 않으면서 용감함의 근육을 키워왔는걸요. 부디 남은 한 해가 이 정도의 용감함으로 충분하기를 빌어볼 뿐이죠. 여러분의 몸과 마음에도 어떤 방식으로든 힘이 센 용기가 깃들기를 바라면서 글을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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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2개
    장*연
    2019-11-15 13:39

    잘 읽었습니다 저도 고민 중이에요 다른후기보다 자세하네요

    문*원
    2019-11-13 11:24

    글 너무 재밌게 잘읽었어요. +_+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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