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정제(spermicide)라는 피임법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 있나요? 한국에서 살정제는 경구피임약이나 콘돔보다는 훨씬 대중에게 덜 알려진 피임법이에요. 하지만, 콘돔 이외에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비호르몬 피임법이기도 해요.
피임법은 크게 호르몬 피임법과 비호르몬 피임법으로 나눌 수 있어요. 이전 글에서 살펴본 경구피임약은 대표적인 호르몬 피임법으로, 주기적으로 호르몬을 복용해서 배란을 억제하는 방법이에요. 애초에 난자가 배란되는 것을 막는 거죠.
반면, 비호르몬 피임법은 호르몬을 이용하지 않는 방법으로 난자와 정자가 만나 수정란이 되거나 착상되는 과정을 방해하는 거예요. 가장 대표적인 비호르몬 피임법은 콘돔이고, 그 밖에 구리 IUD(구리 자궁 내 장치), 덴탈 댐, 살정제, 피임 격막, 자궁경부 캡, 피임 스펀지가 있어요.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건 구리 IUD, 덴탈 댐, 살정제 정도죠.
이번 글에서는 그중에서도 약국에서 구매가 가능한, 살정제에 대해서 다뤄볼게요. (살정제 이외의 비호르몬 피임법들에 대해서 더 자세히 읽어보고 싶으면 비호르몬 피임법을 참고해주세요.)
한국에서 살정제는 잘 알려지지 않은 피임법이라고 했는데요, 에 따르면,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에서의 살정제 사용 빈도는 1% 이하로 낮은 편이에요. 다른 대륙의 경우는 어땠을까요? 같은 자료를 보면, 여러 대륙 중에서도 라틴아메리카에서의 살정제 사용 빈도가 높은 편이에요. 5~10% 정도의 사용 빈도를 나타냈죠. 미국에서의 살정제 사용 빈도는 4.6% 정도이고, 그중 대부분은 물리적인 피임법(피임 격막, 자궁경부 캡 등)과 함께 사용한 경우였어요. 미국에서는 살정제가 일반의약품이다 보니, 구매하기 쉽다는 점에서 미혼 여성에게 매력적인 피임법이었다고 해요.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다른 피임법(콘돔, 피임약 등)에 대한 접근성이 좋아지고, 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살정제의 사용 빈도는 줄어들게 됩니다.
1) 살정제의 성분
노녹시놀-9(nonoxynol-9)의 화학구조식
살정제의 으로는 계면활성제인 노녹시놀-9 (nonoxynol-9)이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어요. 이 있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계면활성제라는 점이에요. 참고로, 계면활성제 중에는 노녹시놀-9과 비슷한 라는 성분도 있어요.
‘계면활성’은 하나의 분자 안에 기름과 과 물과 친한 부분을 모두 가지고 있을 때 갖게 되는 성질로 볼 수 있어요. 친하다는 것은 밀어내거나 서로 경계를 이루지 않고 서로 잘 섞인다는 뜻이에요.
물과 기름은 원래 서로 섞이지 않고 경계면을 이루는데, 계면활성제 분자는 두 물질 모두와 친하기 때문에 그사이에 자리를 잡고 두 액체 사이의 경계를 사라지게 하는 거죠. 대표적인 계면활성제로는 비누와 세제가 있어요. 기름때는 물에 녹지 않아서 물로만 씻어서는 제거하기 힘든데, 비누와 세제는 계면활성제의 성질을 이용해서 옷이나 피부에 묻은 기름때를 떼어내고 물로 씻어낼 수 있게 해주죠.
2) 살정제의 원리
노녹시놀-9은 크게 두 가지 원리로 피임 효과를 낼 수 있어요. 하나는 직접적으로 정자를 죽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자의 운동성을 떨어뜨리는 것이에요. 앞서 계면활성제가 물과 기름을 섞는다고 했었죠. 그럼 계면활성제가 세포막을 만나면 어떻게 될까요? 은 세포를 감싸고 있는 막으로, 물과 친한 구조와 기름과 친한 구조를 이중으로 배열해서 막의 안쪽과 바깥쪽이 경계를 이루고 있어요.
세포막 구조
이때 계면활성제는 옷에 묻은 기름때를 떼어내는 비누 분자처럼, 차곡차곡 배열된 세포막 사이로 끼어들어 가요. 즉 세포막 구조가 손상되는 거죠. 세포막은 세포를 감싼 막이니까, 이게 곧 세포의 손상으로 이어지기도 해요. 그 때문에 직접적으로 노녹시놀-9이 정자를 죽일 수 있게 돼요. 또는 정자를 죽이진 못하더라도, 정자가 할 수도 있어요. 두 과정 모두 결과적으로는 정자가 난자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막는 거라고 볼 수 있죠.
세포막에 계면활성제가 들어갔을 때
사용 방법
1) 질좌제란?
노원 질좌제
해외에서 살정제는 , 필름, 거품 형태 등 다양한 제형으로 판매되고 있어요. 그러나 한국에서 판매 중인 살정제는 한미약품에서 나온 ‘노원 질좌제’라는 제품만 존재해요. 질좌제는 일반적으로 입으로 먹는 약과 달리, 질에 넣는 약이라는 뜻이에요. 질좌제는 실온에서는 고체이지만 질에 삽입하면 체온에 의해서 녹아요. 즉 이 약을 질에 삽입하게 되면 노녹시놀-9을 질 표면에 도포하게 되는 거예요. 그 결과 정자가 질에서 자궁에 가는 것을 방해할 수 있는 거죠.
2) 사용 방법
질좌제 사용방법
한국에서 판매 중인 질좌제를 기준으로 설명해 드릴게요. 질좌제 포장을 열어보면 총알 모양처럼 생긴 약이 들어있어요. 약을 만지기 전에 손을 깨끗이 씻는 것을 잊지 마세요. 개봉한 직후에 표면이 매끄럽지 않아서 다칠 염려가 있으므로, 깨끗한 손으로 문질러 녹여서 표면을 매끄럽게 만든 후 사용하는 것도 좋아요. 또한 살정제 단독으로는 피임 효과가 완전하지 않으므로 물리적인 피임기구와 병용하는 것이 피임 효과 측면에서 더 좋아요.
이 약을 삽입한 직후에는 아직 약이 녹아 퍼지기 전이라서 피임 효과를 볼 수 없어요. 그렇다고 너무 시간이 지나버리면 약액이 빠져나간 후라서 피임 효과가 떨어지죠. 그래서 삽입 시기를 성관계를 갖기 10분~1시간 전으로 지켜주어야 해요. 즉 성관계를 갖기 1시간 혹은 그 이전에 삽입한 살정제는 효과가 없다고 볼 수 있어요.
또한 살정제 1정은 성관계 1번에 대한 피임법이라는 것을 알아두어야 해요. 1시간 이내라고 하더라도 이미 한 번의 성관계를 가진 이후라면(다시 성관계를 갖고자 한다면) 살정제를 다시 삽입해야 하죠.
삽입 시에는 질 깊숙이 삽입하는 것이 중요해요. 깊숙이 삽입하지 않으면 바깥으로 다 흘러서 효과가 없을 수 있기 때문이에요. 관계중 체위에 의해서도 피임 효과에 영향을 많이 받을 수 있어요. 서거나 앉은 상태는 약이 흘러내릴 수 있기 때문이에요. 흘러내릴 염려가 없는 정상 체위가 피임 효과가 가장 좋다고 해요.
살정제를 사용한 직후에 질을 세척하는 것은 자극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권장하지 않아요. 만일 질 세척이 필요한 경우라면 성교 6시간 이후에 하는 편을 권장해요.
장점과 단점
1) 장점
비호르몬 피임법이기 때문에 호르몬에 영향을 주지 않고, 그에 따른 전신적인 부작용이 적은 편이에요. 또한 휴대가 간편하고 즉시 적용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어요. 피임약의 경우 일반적으로 1달 이상은 꾸준히 복용해야 하잖아요. 또, 살정제는 일반의약품이므로 약국에서 바로 구매하여 사용할 수 있어요. 만일 부작용 등으로 인하여 호르몬 피임약을 복용하기 어려운 경우이거나 성관계를 자주 갖지 않는 사람이라면 고려해 볼 만한 피임법이에요.
2) 단점 및 주의사항
가장 큰 단점으로는, 사용자가 미숙할 경우 피임률이 떨어질 수 있으며 사용하는 상황에 따라 피임률이 크게 달라진다는 점을 꼽을 수 있어요. 해외 통계에 따르면, 살정제를 완벽하게 사용했을 때의 피임 실패율은 6% 정도인데, 살정제의 실제 피임 실패율은 28% 정도라고 해요. 한국에서 판매 중인 제품의 설명서에 따르면, 살정제의 피임률은 85~90% 정도로, 10~15% 정도의 실패율을 보인 셈이죠.
살정제의 피임 실패율이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이유는 좌제 형태이기 때문에 제품 삽입 깊이, 관계 시 체위, 관계 직후 처리 방법 등에 의해 약액이 제대로 정자에 닿지 못하여 피임이 실패할 경우가 있기 때문이에요. (살정제 성분만으로는 이었다고 해요.)
또한 살정제 성분이 질 내 자극을 유발할 수 있어요. 앞서 노녹시놀-9이 정자의 세포막을 손상시킨다고 했었죠. 질 내부 표면을 감싸는 표피 세포의 세포막도 정자의 세포막과 비슷하기 때문에, 같은 원리로 손상될 수 있어요. 실제로 살정제를 사용한 여성에게서 질 표피 손상, 간지러움, 따가움, 방광염 등이 발견되었어요. 이 같은 부작용의 발견 비율은 같은 성분의 살정제라도 제형이나 체위 등에 따라서 크게 다를 수 있어요.
또한 이 성분에 알레르기가 있는 경우이거나, 출산 후 6주 이내, 월경 기간, 임부의 경우 사용할 수 없어요.
성매개질환(성병) 예방효과가 있나요? 살정제 콘돔?
살정제는 이름이 정자를 죽인다는 거니까, 일부 사람들은 살정제가 STD(성매개질환, 주로 성관계를 통해 전파되는 질환)를 예방하는 효과가 있을 거라고 기대하기도 해요. 하지만 살정제는 STD에 대해서 예방효과가 없다고 검증되었어요. 그 이유는, 살정제가 정자를 완전하게 사멸시키지는 못하며 질에 자극을 줄 수 있어 도리어 감염에 더 취약한 상태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에요.
(STD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성병, STDs을 참고해 주세요.)
한국에서는 판매하지 않지만, 해외에서는 살정제가 발라져 있는 콘돔을 판매하는 경우도 있어요. 콘돔이 일반적으로 98% 정도의 피임률을 가지는데, 살정제가 있는 콘돔이라고 해서 일반 콘돔보다 더 피임 효과가 높다는 것은 증명되지 않았어요. 일반적으로 살정제 단독보다는 다른 피임기구와 병용하는 것이 더 효과가 좋은 것은 입증이 되었으나, 콘돔을 단독으로 사용하는 것보다 콘돔에 살정제를 더하여 사용하는 것이 더 피임 효과가 좋다 (=살정제 콘돔이 일반 콘돔보다 피임 효과가 좋다)는 것은 증명되지 않은 거죠.
더보기 - 정자의 구조와 운동
정자의 구조
조금 더 궁금하실 분들을 위해, 정자의 구조와 연관 지어 정자의 운동, 그리고 정자가 어떤 과정을 거쳐 난자에 도달하는지 설명해볼게요.
1) 정자의 구조와 운동성
정자는 남성의 생식세포로, 생식을 통해서 유전 정보를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세포에요. 그에 따라 ‘남성의 유전 정보를 난자에 전달하는’ 목적에 적합한 구조를 가지고 있죠.
정자는 구조적으로 크게 머리 부분과 중간 부분, 그리고 꼬리 부분으로 나눌 수 있어요. 총 길이는 0.05mm( 정도) 이고, 그중에서 머리를 제외한 부분이 0.045mm 정도로, 총 길이의 약 90% 정도를 가 차지하고 있어요. 몸에 비해서 엄청나게 긴 꼬리를 가진 셈이죠. 꼬리와 머리 사이, 정자의 중앙 부위에는 꼬리가 움직일 때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해 미토콘드리아가 여러 개 분포되어있어요. 미토콘드리아는 섭취한 영양소를 세포 내에서 사용하기 적절한 형태의 에너지로 만드는 세포 소기관이에요. 자동차에서 엔진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해주면 쉬워요.
정자는 올챙이처럼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올챙이처럼 꼬리를 S자로 움직이지 않고 꼬리를 나선형으로 돌려요. 와인 오프너처럼 돌아간다고 생각하면 쉬워요. 이렇게 움직이는 것이 주변에 점액이 있는 환경에서 이동하기에 유리하다고 해요. 정자의 운동 속도는 대략 1분당 3mm 정도에요. 생각보다 느리다고요? 하지만 정자가 머리카락 두께 만하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이 속도는 1초당 자신 몸길이만큼 이동하는 거예요!
머리 부분의 맨 앞에는 첨체가 있어요. 이 부분에는 여러 가지의 가 있어서 난자를 둘러싼 막을 뚫는 역할을 해요. 첨체 뒤에는 핵이 있어요. 핵은 DNA(유전 정보)를 보관하고 있는 곳이죠.
2) 정자가 난자에 도달하기까지
남자가 사정하는 한 번의 정액에는 3,000만~7억5,000만 개의 정자가 들어있다고 해요. 하지만 그 중에서 나팔관까지 도달할 수 있는 정자는 수백 마리에 불과해요. 그 이유는 질 내부에 분비되는 산성물질로 인해서 죽거나 자궁경부에 있는 에게 잡아먹히거나 길을 못 찾는 것들도 존재하기 때문이에요.
정자가 나팔관까지 이동해야할 거리는 약 18cm 정도로 정자 길이의 3600배 정도 돼요. 자궁 경부부터 출발한 정자가 나팔관에 도달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70분 정도라고 해요. 정자 길이를 사람 키처럼 상상해보면, 180cm인 사람이 대략 잠실에서 강남까지 가는 정도라고 볼 수 있겠네요. 정자가 나팔관에 도달한 이후에는 난자 주변의 장애물을 뚫고, 단 하나의 정자만 난자와 만나 수정 과정이 일어나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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